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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의 고백
올 해로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하지만 교환학생을 다녀온 탓에 전공학점이 많이 부족해 다음 해 봄에 졸업하기는 힘들지 모른다. 나는 초과 학기를 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데, 남들은 그냥 한 학기 더 하라고 한다. 부러 졸업을 유예하는 사람도 많은데 무엇이 급하냐는 물음을 덧붙였다. 사실이었다. ‘졸업 유예’라는 단어를 검색하기만 해도 우려를 표하는 많은 기사들이 수년 전부터 쏟아져 나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대학교 4학년에 머물러 있는 청년들은 기형적으로 많다. 한 취업 포털 사이트의 2016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4년제 대학교 졸업 예정자 10명 중 세 명은 졸업을 유예한다고 한다. 알바몬에서 실시한 작년 조사 결과를 보면 이 수치는 55%로 늘어나 다소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졸업을 미루는 이유는 대학생에게 주어지는 혜택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단순히 대학을 떠날 엄두가 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특수한 경우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아주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삶의 새로운 출발선이 되어야 할 졸업과 동시에 학생이라는 신분을 잃는 것이 두려운 대학생들. 무엇이 이토록 그들을, 아니 우리를 두렵게 했을까.
‘청년 경제고통지수’ 라는 것이 있다. 15~29세 청년들의 체감실업률과 청년 물가지수 상승률로 산출한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이 고통지수가 6년 내 최악의 상태라고 한다. 취업은 물론 코로나로 인해 자영업이 무너지면서 알바조차 구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달랐을까? 2012년 금융감독원에서 공개한 '청년 대출 현황' 자료를 보면 20대 채무 불이행자가 2만 명에 육박했으며 대다수는 학자금 대출과 취업난으로 인한 생계형 대출이었다. 당시에도 취업난 때문에 늘어나고 있는 졸업유예에 관한 내용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경제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왔음이 아니다. 대학생들에게 졸업이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 사람들은 졸업에 대한 두려움과 졸업 유예에 대한 이야기에서 경제상황에 대한 설명을 빼놓지 않는다. 구체적인 근거로써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원인도 아니다. 졸업하기 겁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위기와 일련의 책임감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감까지 직면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대학 졸업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인물이 있다. 바로 격동의 80년대를 살았던 시인 기형도이다. 그는 작품 속에서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오히려 형언할 수 없는 두리뭉실함 때문에 두려웠고 두려운 것이다. 무려 40여 년 전에 발화된 고백에, 세대를 거슬러 우리는 공감한다.
교정 밖은 전쟁터였다.
기형도는 당대 정치적, 사회적 돌풍에 휩쓸리지 않았다. 대신 흔들리는 나뭇잎에 아파했다. 나무의자 아래에 책들을 버려두고 거리로 몸을 내던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감지도 않았다. 대신 돌계단 위에서 플라톤을 읽었다. 플라톤이 이상 국가를 논할 때, 거리에서는 총성이 울려 퍼졌다. 학교 밖으로 나가면, 그곳은 전쟁터였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철인정치를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꼽는다. '철인이 치자가 되어야 국가나 개인이 진정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철인은 철학자, 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그가 <국가>를 읽던 그때는 철인(哲人)이 아니라 철인(鐵人)이 국가와 개인을 철로써 고꾸라트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원하던 세상도, 기형도가 원하던 세상도 아니었다.
돌계단에 앉아 책을 읽을 뿐인데 담 너머로는 총성과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교문 밖을 나서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곳을 떠났을 때 마주할 것들이 나를 행복으로 이르게 하지 못함이 자명하다. 안락한 울타리 안에 있어도 짙은 피 비린내. 밖은 내가 원하던 세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직접 보지 않아 더욱 선명하다. 어쩌면 그 비명이 나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으나 졸업이란 것은 어떤 길이든 빨리 택하라고 등을 떠민다. 그 선택의 강제는 우리로 하여금 대학을 떠나기 두렵게 만든다.
교정 밖은 여전히 전쟁터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떨까?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교정에서 어떤 책을 읽는가? 우리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그때 그랬듯 여전히 책들은 의자 밑에 버려져 있다. 플라톤을 읽지도 않는다. 이상적인 국가나 치자에 대해서도 논하지 않는다. 인문학적 가치를 추구하는 대신 '쓸모 있는 것'을 익히려 한다. 어떠한 치자도 우리의 앞날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 그렇다. 우리는 열심이고, 열정적이다. 대학에 숲길이 있는지도, 그 숲길이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설령 안다 해도 우리는 과거의 그들이 그랬듯 눈을 감고 그 길을 걸을 것이다. 그렇게 나라는 사람의 미사여구를 늘려간다. 학교 밖으로 나가면, 그곳은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청년들은 감옥에 가거나, 군대로 도피하거나, 기관원이 되었다. 그 길목에서 기형도는 어떠한 선택도 하지 못하고 서 있다가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등을 떠밀던 것이 바로 졸업이었다.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학생들을 과감히 대학을 떠나 정해진 틀을 벗어나려 한다. 또 어떤 학생들은 해외 등 다른 곳으로 도피를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럴만한 자본이 있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것이다. 대부분은 수천 만원 대의 학자금 대출을 받아가면서까지 학교를 다니며 소위 스펙을 쌓는다. 눈을 감고 숲길을 걷는다. 하지만 그 안락함은 대학생의 신분으로 '유예'를 샀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일 뿐, 학사모를 쓰는 순간 우리는 상환의 길을 가야만 한다. 그 길 위에서 얼마나 빠르게 취업과 만날 수 있을지는 누구도 보장하지 못한다.
변화했지만 여전한 것
기형도의 시가 쓰였던 시대와 현재의 차이점을 찾자면, 그때는 내가 나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가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의 기형도와 사뭇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기형도 보다는 현실에 영합한 후배의 삶과 조금 더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바꾸려고 하기보다 나를 현실에 맞추는 편이 더 현명한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의문만이 남았다.
경제가 나아진다 해도 대학 졸업은 늘 두려움의 대상일 것이다. 과거에 그들이 직면했던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우리가 다른 문제와 싸우고 있는 것과 같이, 미래에는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될 것이다. 사실 문제없는 사회란 존재하기 힘들다. 소크라테스 역시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야기했다. "그 국가는 아마 본보기로써 하늘에 비치되어 있을 것이다.", "그 국가가 어디엔가 존재하느냐 혹은 존재할 것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즉, '이상'적인 사회는 실제를 초월해야 하는 개념적인 존재로써, 그것이 실재하느냐 혹은 언젠가 실재할 것이냐라는 것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가능한 불가능성
소크라테스는 본보기로 하늘에 비치되었을 거라는 이상 국가에 대해 "누구든 원하면 그것을 보고, 본 것에 따라 자신 안에 국가를 건설할 수 있도록"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상 국가가 이 땅 위에 존재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이상적인 사회를 인지하고 그려낸다면 자신 안에서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으로, 즉, 존재의 가능 불가능을 따지기보다는 이것을 갈망하고 초월하기 위해 노력하는 철인이 키워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며, 그래야만 비로소 모두가 행복스러운 국가에 다가갈 수 있다는 가능한 불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40년 전의 그들은 책을 버려두었고 그것은 플라톤이 기술했던 이데아로의 초월 가능성을 봉쇄시켰다.물론 그것은 당시 그들에겐 최선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이 있었기에 현재의 우리가 거리로 나가 몸을 던지지 않고 경제와 취업문제만을 고민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만약 그때 더 많은 대학생들이 돌계단에서 플라톤을 읽었다면 이상 국가에 조금은 더 가깝게 다가갔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그 시절은 이미 갔고 바꿀 수 있는 것은 현재뿐이다.우리는 40년이 지나 기형도의 시를 다시 읽는다. 사회구조는 변화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두려움에 떨며 작품을 읽는다. 하지만 설령 그의 시가 두려움에서 마무리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같아서는 안 된다. 이 공감의 지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느끼지 못하며 놓치고 살고 있는지 읽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세대에 쓰일 시는 현실과 영합하지도, 갈래길에서 두려워하며 등 떠밀리지도 않아야 할 것이다. 완전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려는 초월적 주체이자 철인이 되어 읽고 써야 한다. 설사 그 과정이 아주 불가능해 보이고 고통스럽게 쓰인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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